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닝닝333 2025. 8. 24. 14:30

말년의 유스티니아누스
황후의 사망
테오도라 황후는 548년에 죽었지만, 유스티니아누스 그 후로도 17년 동안 더 살았다. 아내가 죽은 이후 그는 종교 문제에 지나치게 집착해 통치를 소홀히했다. 특히, 벨리사리우스 같은 유능한 장군을 시기하고 의심을 하였다.

죽음
565년 11월 14일 유스티니아누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서거하였으며, 그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다음 제위는 그의 여동생의 아들이자 테오도라의 질녀인 소피아와 결혼한 유스티누스에게 이어졌다.

로마법 대전
기원전 450년, 로마가 12표법을 발표해 최초의 성문법을 만든 이후 유스티니아 통치기까지 로마에는 너무나 많은 법이 만들어졌다. 이 법들은 너무 번잡하고 모호하거나 모순적인 구절이 많아서 정비가 불가피했다. 이미 한 세기 전 테오도시우스 2세가 로마법의 집대성을 시도해 《테오도시우스 법전》을 발표한 적이 있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이 법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완전히 새로운 법전을 만들고 체계화해서 법치의 원칙을 세우고 법을 공평히 집행하려고 결심했다. 그는 이를 위해 527년 트레보니아누스를 법무관으로 임명한 후, 그의 지휘 아래 편찬위원회를 구성해 529년부터 세 차례에 걸쳐 〈칙법휘찬〉, 〈학설휘찬〉, 〈법학제요〉를 발표했다. 흔히 이를 《로마법 대전》 또는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이라고 한다. 각 법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칙법휘찬〉(Codex Constitutionum) : 제국의 모든 로마법에 최고 권위를 가지는 법
〈학설휘찬〉(Digesta, Pandectae) : 고대 로마의 모든 법률가의 주요 저작을 포함하여 법학설을 정리한 책
〈법학제요〉(Institutiones) : 위 두 법전에서 주요 내용을 발췌하여 제국 내 법학교에서 사용할 교과서
이 법전에는 사회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분쟁 상황이 법으로 규정되어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집에서 자란 나무의 가지가 옆집으로 뻗었을 경우, 가지에 달린 열매는 누구 소유가 되는지 정확하게 규정하는 식이다. 유명한 구절은 다음과 같다.

바다와 바닷가는 모든 사람의 소유다. 내 제국의 모든 사람은 누구나 마음 놓고 바닷가에 나갈 수 있다. 아무도 "여긴 내 땅이야! 나가!"라고 말할 수 없다.
강은 모든 사람의 소유다. 내 제국의 모든 사람은 누구나 강에서 물고기를 잡을 수 있다. 아무도 그것을 막으면 안 된다.
바닷가에서 파도에 실려 온 보석이나 값진 재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가져도 된다.
노예를 소유하고 급료를 주지 않고 부려도 된다. 그러나 노예가 주인에게 덤비지 않는 한, 때리거나 학대할 수 없다.
입법 과정에서 유스티니아누스는 여성의 권리를 상당한 수준으로 끌어 올렸다. 남녀 신분이 다르다는 이유로 결혼을 못 하게 하는 법을 철폐했고, 여성에게 지참금을 강요하지 못하게 했으며, 지참금을 가져오지 않더라도 이혼하지 못하게 했다. 이혼할 때는 남녀가 같은 권리를 누리게 하고, 배우자의 부정에 대한 처벌도 동등하게 만들었다. 이전에는 남편은 부인이 간통했다고 의심하면 먼저 이혼한 후 간통 혐의를 입증하는 재판을 할 수 있었으나, 유스티니아누스는 아내의 간통이 입증된 이후에야 이혼할 수 있도록 법을 혁신했다. 또한 성범죄 처벌도 강화했다. 여성을 납치하면 신분에 상관없이 사형에 처하게 했고, 신분과 지위를 이용하여 여성을 성적으로 착취하는 일도 금지했다. 그 결과 여성은 노예라 하더라도 성관계를 강요받지 않게 되었다. 이러한 조치가 남성들을 화나게 만든 건 물론이다.[14]

입법 사업은 옛 로마법의 재흥을 의도한 것이나, 이처럼 시대 변화를 반영해 법조문 자구가 수정되어 있다. 세 법전 이후에 만들어진 법들은 신칙법(Novellae)으로 정리되어 있다. 이들을 모두 하나로 합쳐서 16세기 이래 로마법 대전(Corpus Juris Civilis)이라고 부른다.[15]